메이지(明治) 시대는, 우리나라가 세계에 문호를 개방해 구미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 그에 동화함으로써 근대 일본의 기반을 쌓은 시대인데 아스카(飛鳥)•나라(奈良)와 함께, 우리나라의 문화사(文化史)상 지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메이지(明治) 건축도 에도(江戶) 시대부터 계승되어진 뛰어난 목조건축의 전통과 축적을 토대로 새로운 구미의 양식과 기술 그리고 재료를 받아들였습니다. 석조 건축물과 벽돌을 쌓아 만든 건축물 등 서양식 건축을 도입하였고 산업 혁명이 진행됨에 따라 철과 시멘트, 유리를 사용하여 근대 건축의 토대를 쌓았습니다.

이러한 건축 가운데 예술상, 역사상 값진 건축물도 지진이나 재해, 전쟁의 폐해 등으로 많이 상실되었습니다. 특히 전후(戰後) 산업이 고도로 성장함에 따라 크고 작은 공적/사적 개발 사업이 일어났는데, 이것으로 인해 적지 않은 건축물들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헐어져 가는 이러한 문화재를 애석히 여기고 이것을 보존하기 위해 지금은 두 사람 모두 고인이 되셨지만 구 제도 제4고등학교 동창생이었던 다니구치 요시로(谷口吉郎) 박사(博士)(박물관 메이지(明治)촌 초대관장)과 츠치카와 모토오(土川元夫)씨 (전(元)나고야철도(名古屋鐵道) 주식 회사 회장)이 함께 서로 의논하고 두사람 협력 아래 메이지(明治)촌이 창설된 것입니다.

메이지(明治)촌이 재단법인으로서 발족된 것은 쇼와(昭和)37년이었습니다. 공사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 진척되었습니다.

야마토(大和) 시대 안간(安閑)천황기(天皇記) 이루카 미야케(入鹿屯倉)의 고대사 수수께끼가 숨겨진 아루카이케(入鹿池) 호반(湖畔)의 풍부한 자연을 소중히 보존, 드디어 박물관 메이지(明治)촌은 쇼와(昭和)40년3월18일에 개촌되었습니다.

개촌 당시에는 아득히 먼 홋카이도에서 이축(移築)된 삿포로 전화 교환국과 교토(京都) 성 요한 교회당, 그리고 도쿄(東京)에서 모리 오가이(森鷗外)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양 문호가 기이하게도 서로 앞뒤로 해서 살았고 많은 명작을 남긴 유서깊은 주택 등의 건물과 전철 등의 시설물이 15개밖에 남아 있지 않았으나, 현재는 67개에 달하고 박물관의 부지도100만평방미터로 2배 가까이에 뻗쳐 있습니다.

메이지(明治)촌에서는 해체되어 가는 건축물 중에서 값진 것을 골라 차례차례 이축(移築)해 복원(復元)을 했습니다. 그러한 건축물 중에는 쇼와(昭和) 초기의 것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구소재지는 거의 일본 전토에 걸쳐 있으며, 멀리 시애틀(Seattle), 하와이, 브라질에도 남아 있습니다.

그 중에서 나라의 중요 문화재 10개와 아이치현(愛知縣)의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건축물 1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축(移築)한 건축물은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가장 잘 드러나도록 배치되어 있고 주변 길이나 정원, 식수(植樹)등을 배려해서 마을의 환경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각각의 건축은 실내에 가구 집물 등을 진열해서 공개하는 것 이외에 그 건물과 관련이 있는 자료를 상시 전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필요에 따라 메이지(明治) 시대의 역사자료를 특별히 전시할 때도 있습니다.

또한 입장자가 편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촌내에 선로를 깔아서 메이지(明治) 시대 최초의 전철이나 증기기관차를 움직이게 합니다. 우지야마다(宇治山田) 우체국에서는 실제로 우편업무를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메이지(明治) 시대의 건축물을 보존함과 동시에 역사자료를 수집•보존•관리하는 박물관 메이지(明治)촌을 운영 공개하는 것은 국민이 여기를 방문해 메이지(明治)의 새로운 형식과 마음을 발견하고 체험하는 사회 교육의 장소가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레크리에이션의 장소로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나아가서는 현대 및 장래 국민 생활의 향상 및 문화 전승과 창조에 기여함에 있어 큰 의의를 가집니다.

나아가 국제적으로 메이지(明治)촌은 인류유산의 일부이며, 동서문화교류의 증거입니다. 우리나라와 세계 여러 나라의 국민이 서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확신합니다.